엔카이야기/게시판

昭和の歌姫 美空ひばり

홍종철 2011. 10. 9. 10:55

      (퍼온 글)



 

 

                                                 일본의 이미자 미소라 히바리(美空 ひばり)를 아시나요?

 

 

 

  일본에서는 많은 재일 한국인들이 각 방면에서 일본인 보다 더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점을 어느 일본인 학자는 일본의 어느 방면이든지 정상에는 항상 재일 한국인이 있다고 했다. 그 예로, 재계에는 롯데의 신격호 회장, 레스링계 역도산, 프로 야구계에 장훈, 김정일, 카라테의 최영의, 골프계의 유명한 아오키(靑木)이며, 특히 스포츠 및 연예계에는 2세대를 넘어 3세 4세대 들이 활약하고 있다. 한국인의 핏줄을 받은 이들 중 일부는 출신을 비밀로 하기도 한다는데, 아마도 차별로 인해 정관계(政官界)로 진출 못하는 한(恨)을 노래나 스포츠로 발산 한 것 같다. 이에 한국계 엔카(演歌) 가수이며 일본의 국민 가수인 고(故) ‘미소라 히바리(美空 ひばり)’에 대해 소개 해 보고자 한다. 

 

 

먼저, 일본의 엔카(演歌)가 무엇인지에 대해 간략히 보자. 엔카는 일본에서 대중가요를 대표하는 것 중의 하나 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일본에서는, 젊은층의 노래에 밀려 인기 차트 10위권에 들어가는 엔카가 별로 없다고 한다. 이에 비하여 일반 대중에 있어서 엔카는 아직도 카라오케 주점이나 온천여관의 무대에서 가장 많이 불려지며, 방송에서도 많이 방영된다. 그 예로 연말이 되면 연말 가요 결산 방송인 ‘가요 홍백전’이 방송 되는데 거기에 반수 정도의 엔카 가수가 나온다. 

 

 

엔카(演歌)는, 서양으로부터 새로운 음악이 들어오면서 일본민요의 변형 형태로 만들어진 음악이라 한다. 일본 민요와 다른 점이 ‘라-시-도-미-파-라’ 로 구성 되어 있어 비 평균 음계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엔카와 한국의 트롯이 음악적으로 비슷하다고 하지만, 한국의 트롯 가수들이나 작곡가들은 다르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일부에서 일본 엔카와 한국의 트롯이 정서적인 면에서 비슷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문화적으로 동양권에 해당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에서 엔카가 널리 불려지게 된 것은, 봉건사회에서 근대화로 이동하는 시기에 서양 문물의 전달로 인한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사 내용이, 일본 근대기에 공업의 발달로 농촌 사회에서 도시 사회로 전환 하는 과정에서 농어촌의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타향살이 하는 이들의 고향에 대한 향수, 사랑과 이별, 인생, 외로움과 술에 대한 노래, 항구 등의 정서를 대변하는 형태를 담고 있어 그것이 ‘엔카’ 라는 장르로 만들어 졌다고한다. 

 

 

주로 고향에 대한 향수를 노래한 대표 곡들로, ‘북쪽 고향의 여인(北國의 女)’ ‘눈의 고향 (雪國)’등을 들 수 있다. ‘북쪽의 고향의 구석진 술집에서는 여인이 날 위해 기다린다’, ‘눈 내리는 아름다운 고향에 가고 싶다’ 등의 가사 내용을 담은 엔카는 타향에서 사는 일본인의 고향 생각의 감초 역할 한다고 볼 수 있다. 

 

 

일본 최고의 엔카 가수 ‘미소라 히바리(美空 ひばり)’의 본명은, 가토 히바리(加藤 和枝)이며, 그녀는 1938년에 아버지(김해 출신) 가토 마스키츠(加藤 增吉)와 어머니 기미에(喜美枝) 사이에서 태어나 9세 때 데뷔하여 몇 편의 영화 출연과 함께 40년을 엔카와 함께 한 가수이다. 그녀의 사후, 일본 여성으로써 최초로 ‘일본 국민 영예상’을 수상 하여 죽어도 죽지 않는 ‘불사조’ 라는 별칭을 얻었다고 한다. 한국의 트롯의 여왕이 이미자씨 라고 한다면, 일본 엔카(演歌)의 여왕이 미소라 히바리씨(氏)라고 보면 된다. 미소라 히바리가 한국계 2세라는 이야기를 들은 후, 필자는 일본 엔카에 대해 작은 관심으로 그녀의 히트 곡이 담긴 CD 한 장을 구입 했는데, 일본 노래를 듣기 위해 돈 들인 것은 일본 체재 5년 동안 이것이 전부였다. 미소라의 노래가 필자의 타향살이 정서와 맞아 떨어진 탓인지 그녀의 노래를 자주 듣게 되었다. 

 

 

일부에서는 미소라 히바리의 출신에 대해 여러 가지 말이 많았다고 한다. 이에 일본에서 활약하다가 돌아온 작곡가 손목인씨가, 어느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미소라 히바리’, ‘미야코 하루미’등의 유명 엔카 가수가 한국계라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술회했으며, 우에다(植田 剛彦)씨가 쓴 책, <재일(在日)한국인의 실력>에서도 미소라 히바리가 한국계라는 사실을 드러냈다. 또한, 미소라 히바리의 어머니와 이웃에 살았고, 미소라의 한국 공연을 추진한 스즈키 마사부미(鈴木 正文)씨는, 미소라는 아버지의 고향 한국에서 노래하는 것이 소원 이었다고 증언 하였으며, 그 꿈도 이루지 못하고 죽은 것에 대해 애통해 했다고 한다. 토쿄에서 발행되는 교포 월간지 ‘아리랑’에서는, 미소라 히바리가 어린시절 일본인 작곡가 고가 마사오(古賀 正男)씨 앞에서 ‘아리랑’을 불렀고, 사후에 나온 ‘히바리 세계의 노래를 부르다’ 앨범에 도라지 타령이 수록 되어 있으며, 후렴 부분인 ‘에헤야’ 는 또렷한 한국어로 수록 되어 있다고 했다.

 

 

미소라 히바리가 한국계라는것은 유명한 사실로 아버지가 김해출신이라고 한다. 생선가계집 딸로태어나 9세때데뷔햇고 천재소녀란 명성을얻엇다고 한다. 그녀는 죽기전까지도 한국을 아주 그리워햇다고 한다. 한국에서 음반을내고 공연을 하고싶엇지만 당시는 수입금지시기라 항상 아쉬워햇고 일본어로 노래를 부를수없다고 해서 영어로 곡을불러 공연하는것까지 검토했을 정도엿다고 한다. 그토록 한국을 그리워했건만 인생의 말년에 와서야 그녀는 자신이 한국출신임을 밝힐수 있었다. 폐허의 잿더미속에서 일본 주식회사를 이루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최대의 찬사와함께<국만영예상>을 받을만큼 전 국민적 사랑을 받은 그녀이기에 한국 출신임을 밝히는게 더더욱 어려워겠지요? 일본의 전국민적스타가 그토록 한국을 그리워 마지않았다니 아이러니컬하다. 

 

 

그녀는 죽기 2년 전인 1987년에 대퇴골골두양사(大腿骨骨頭壤死)라는 병으로 후쿠오카 재생병원(福岡再生病院)에 입원하였고, 100일여간의 투병 생활 끝에 재기 하였으나 1989년에 간질성 폐질환으로 51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그녀는 호소력 짙은 가창력에 미모까지 갖추었으며 1천4백 여곡을 발표 했고, 수많은 히트 곡을 남겨서 음반 판매량이 4천만 장을 넘었다고 한다. 그중에도 말년의 병상에서 일어나 발표한 곡, 괴롭고도 무거운 여인의 사랑을 표현한 ‘헝클어진 머리(みだれ 髮)’ 는 그녀가 자신의 심경을 작사가에게 의뢰하여 작사한 곡이라 한다. 이곡의 마지막 가사를 보면 /캄캄하고 끝이 없는 시오야 곶/ 홀로 외톨이로 있지 말게 해 주오/ 는 어쩌면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아쉬움의 표현이었을지도 모른다. 

 

 

필자가 유일하게 부를 수 있는 일본 노래이며, 그녀의 자서전적인 인생을 노래한 듯한 곡 ‘강물의 흐름 같이(川の流れのように)’ 는 일본인들 사이에서 최고 가요로 여겨진다. 이곡 가사 내용으로 이번 호 이야기를 맺자. 

 

川の流れのように


知らず知らず 歩いて来た
細く長いこの道
振り返れば 遥か遠く
故郷が見える
でこぼこ道や 曲がりくねった道
地図さえない それもまた人生
ああ川の流れのように ゆるやかに
いくつも 時代は過ぎて
ああ川の流れのように とめどなく
空が黄昏に 染まるだけ

生きることは 旅すること
終わりのない この道
愛する人 そばに連れて
夢探しながら
雨に降られて ぬかるんだ道でも
いつかはまた 晴れる日が来るから
ああ川の流れのように おだやかに
この身をまかせていたい
ああ川の流れのように 移りゆく
季節 雪どけを待ちながら

ああ川の流れのように おだやかに
この身をまかせていたい
ああ川の流れのように いつまでも
青いせせらぎを 聞きなが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