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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롯트가 먼저냐? 엔카가 먼저냐 ?논란

홍종철 2011. 12. 18. 12:58

 (퍼온글)

           지울 수 없는 이름, 古賀政男

우리나라 유행가 초기에 일본 유행가의 영향이 상당히 많았다는 점은 앞서 여러 차례 확인해 볼 수 있었다. 음반으로 발매된 최초의 유행가인 '이 풍진 세월'부터가 일본 유행가 곡조를 사용한 것이었고, '시들은 방초'나 '장한몽가' 같은 1920년대의 인기곡들은 가사까지도 일본 유행가의 것을 거의 직역해서 나왔다.

하지만, 그러한 예는 본격적인 유행가 창작 기반이 아직 조성되지 않았던 시기의 현상이므로, 어느 정도 불가피한 면이 있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외래문화가 처음 유입되는 시기에는 수용의 첫 단계로 어느 정도의 모방이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이후 1930년대에 접어들면 본격적인 유행가시대가 전개되므로 1920년대와는 상황이 다르다고 볼 수 있는데, 30년대 일본 유행가의 영향은 자체 기반 없이 전적인 수용 일변도로만 이루어졌던 20년대와는 양상을 조금 달리한다고 하겠다.

1930년대 일본 유행가의 영향은 우선 음반이나 가사지 등 당시 자료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몇몇 이름들에서 손쉽게 찾아 볼 수 있으니, 古賀政男, 江口夜詩, 竹岡信幸 등이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고하정남, 즉 코가 마사오(1904-1978)는 1930년대 이후 일본 유행가의 한 전형을 확립한 작곡가로, 그의 수많은 작품은 이른바 '코가 멜로디'로 불리며 지금껏 일본 유행가의 고전으로 남아 있다. 그는 콜롬비아레코드와 테이찌꾸(帝蓄)레코드에서 주로 작품을 발표했는데, 같은 시기 우리나라에서도 콜롬비아, 오케레코드를 통해 많은 곡들이 소개되었다. 일본에서 지금까지 널리 불리는 '酒は淚か溜息か ', '丘を越えて', '影を慕いて' 등은 모두 채규엽이 불러 ''술은 눈물일까 한숨이랄까', '희망의 고개로', '님 자취 찾아서' 등의 제목으로 알려졌고, 코가 멜로디의 걸작으로 꼽히는 '東京ラプソデイ'는 김해송이 '꽃서울'이라는 제목으로 번안해서 불렀다. 일제시대 우리나라에서 발매된 유행가 가운데 코가 마사오가 작곡한 것은 현재 40여 곡이 확인되고 있으나, 아직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것도 많이 있으므로 전체 수는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코가 마사오는 일본에서 태어난 뒤 당시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고 있던 우리나라로 이주하여 청소년기를 보내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코가 마사오가 확립한 일본 유행가의 전형이 그가 어린 시절 접했던 우리나라 전통음악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더 나아가 일본 유행가의 뿌리가 우리나라 음악에 있다는 주장까지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코가 마사오가 우리나라 음악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그 자신도 생전에 인정했던 바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 유행가의 뿌리가 우리나라에 있다고 하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 너무 지나치다 하겠다. 일본 유행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해도 1930년대 당시 조선 민중의 감정을 담아 낸 유행가들은 전체적으로 볼 때 결국 우리 것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코가 마사오가 개인적으로 우리나라 음악의 영향을 아무리 많이 받았다 해도 그의 작품은 엄연히 일본 유행가의 틀 속에 있는 것이다. 여기에 '뿌리'를 들먹이며 억지스런 논리를 펴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코가 마사오 외에도 江口夜詩, 즉 에구찌 요시(1903-1978) 역시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40곡이 넘는 작품이 1930년대 유행가 목록에서 발견된다. 그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특징적인 경향은 흔히 '江口調'로 불리며 '코가 멜로디'와 함께 일본 유행가의 기틀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에구찌 요시의 작품은 콜롬비아나 폴리돌레코드에서 대부분 발매되었는데, 특히 '急げ幌馬車'를 번안한 '홍루원'이 채규엽의 노래로 크게 인기를 끌었다. 이밖에 김영길이 부른 '국경의 밤'을 작곡한 阿部武雄(아베 타께오), 채규엽의 '명사십리'를 작곡한 竹岡信幸(타께오까 노부유끼) 등 1930년대 일본에서 활동했던 유명 작곡가들의 상당수가 최소한 한두 곡씩이라도 우리 유행가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

'조선타령' 음반(奧山貞吉 편곡)

작곡뿐만 아니라 편곡 분야에까지 확대해 살펴보면 당시 일본 유행가의 영향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곡의 성격은 물론 기본적으로 작곡자에게 달린 것이지만, 편곡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발생하는 미묘한 분위기의 차이 또한 무시할 수는 없다. 일제시대 유행가 관련 정보에서 편곡자에 관한 것은 그렇게 많지 않으나, 현재 밝혀져 있는 것으로만 보자면 일본 작가들의 비중은 작곡 분야에 비해 월등히 높게 나타난다. 특히 奧山貞吉(오꾸야마 테이끼찌)이나 仁木他喜雄(니끼 타끼오)같은 사람은 편곡한 작품 수가 무려 100곡이 넘는 것으로 집계가 되는데, 1930년대 활동하던 우리나라 유행가 작곡가의 상당수가 편곡까지 제대로 소화하지는 못하고 있었던 것을 감안해 보면 일본 편곡자들의 영향 정도를 더욱 실감할 수 있다.

 

사실 광복 이전 유행가가 일본 유행가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은 근본적으로 일본의 식민지배라는 정치적 상황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음반산업 자체도 대부분 일본 자본이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유행가 생산을 둘러싼 구조적 환경에서부터 이미 일본 유행가의 영향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당시 일본으로부터 받은 영향은 비단 유행가뿐만 아니라 문화 전반에 걸쳐 넓고 깊게 이루어졌으므로, 이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판은 공감을 얻기 어려운 감정적 국수주의로 흐르기 십상이다. 물론, 일본 유행가를 베끼는 표절 행위나 일제 말기 전쟁 분위기 조성에 협조한 군국가요의 경우는 엄정한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겠지만, 전체적으로 객관적인 시각에서 1930년대 일본 유행가의 영향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古賀政男, 그 이름 넉 자는 우리 유행가의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것이다.


글 : 이준희
서울대학교 대학원 동양사학과 수료.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과정.
[사의 찬미(외)](2006),
[일제침략전쟁에 동원된 유행가,‘군국가요’다시보기](2003) 등